아이들의 시선 끝엔 언제나 근사한 것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아이의 눈을 거치면 세상 신기하고 멋진 것이 된다.
지하철에서 만난 꼬마가 ‘와, 아빠! 저거 봐! 내가 말한 게 저거야!’하는 설레는 외침에 나도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그곳엔 지하철이 종류별로 서있었다. 이전에 몇 번이고 지나쳤던 지하철 차고지였다.
나에게 지하철 차고지를 끼고 달리는 3호선 구간은 지루하기만 했다. 경기도민이 그렇다. 서울 한 번 나가려면 긴 지하철을 한 시간 넘게 타야 했으니까.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아까워 책을 읽거나 핸드폰으로 꼭 보지 않아도 되는 유머 영상을 보며 버틴다. 이사를 많이 다녀서 대중교통을 많이 탄 내겐 긴 시간을 버티는 건 익숙한 일이지만 지루함은 여전하다.
그런데 꼬마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멋있지? 내가 예전에 봤다는 게 저거야!’ 설레는 목소리로 3호선의 지루한 공기를 깨는 아이의 목소리. 나를 포함한 몇 어른이 핸드폰에서 고개를 들고 창밖을 본다. 아이는 창문을 향해 몸을 틀어 앉는다. 신기하다, 신난다, 재밌다. 온갖 생생한 호기심이 쏟아 나오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이란 순식간에 어른의 마음을 파고드는 힘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소중하지만 잊고 지내는 무언가를 기억하게 하는 힘 말이다.
그래서일까. 아빠는 나 어릴적 했던 말을 유난히 생생하게 기억하신다.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유치원에서 달란트 시장을 했을 때다. 당시 나랑 유치원을 같이 다니던 혜진이란 애가 있었다. 그 애는 똑 부러져 항상 자기 몫을 잘 챙겨, 어른들이 ‘똑똑하게도 멋진 것을 골랐네!’라고 매번 칭찬받던, 7살 치고는 세련된 애였다.
달란트 시장에서 혜진이는 자신의 세련된 안목을 갖고 엄마들이 기부한 새 물건들만 쏙속 골라 챘다. 채 비닐도 뜯기지 않은 새 원피스들이었다. 아이들의 달란트 시장놀이를 지켜보던 엄마들은 ‘역시 혜진이는 달라!’라는 칭찬을 한 마디씩 했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부서진 초코파이 하나, 멍든 바나나 1개 그리고 낡고 작은 아기 옷 하나를 사고는 돈을 남겨왔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는 조금은 속상한 마음으로 내게 물었단다. 초코파이와 바나나와 아기 옷은 왜 샀어? 그랬더니 조그만 꼬마가 이렇게 말했단다.
‘아빠가 초코파이 좋아하잖아. 엄마는 바나나 좋아하고, 예찬이는 옷이 필요하니까. 우리 가족 거 하나씩 내가 사 왔어!’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일을 아빠는 내가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며칠 전처럼 말한다. 너는 정말 예쁜 애였어. 아빠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어리고 순해서 가족이 세상의 전부이던 어린 딸의 작고 작은 말. 그걸 엄마 아빠는 아직도 기억한다.
지하철에서 즐겁게 감탄하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이렇게 함께 자라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른은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고 아이는 어른의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집고 들어가 작은 품으로 꼭 안아주면서. 때로 삶이란 이렇게 둥글게 둥글게 이어지며, 서로의 마음을 콕 찔렀다가 만졌다가 안아줬다가 하는 일의 반복이 아닐까.
지하철에서 만난 꼬마를 따라 창밖의 지하철 차고지를 보며, 어리숙했던 유년의 나와 그걸 기억하는 아빠 엄마의 마음과 다시 그것을 듣고 오늘을 잘 살아내 봐야지 다짐하는 나를 생각한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자라난다. 둥글게 둥글게 서로를 살피고 사랑하면서.
written by 청민 │ 202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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