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때 전학 간 학교에서 은따를 당했다. 한 번은 자기가 원할 때 바로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욕을 먹고 주먹으로 맞을 뻔한 적이 있다. 어렸고 또래보다 섬세했던 나는 그 시절 겪은 은따의 경험들을 이겨내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긴 시간 일기장에 쓰고 또 쓰고, 그것들이 가지고 온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반복해 쓰면서.
<이제야 언니에게>는 제야의 일기로 시작한다. 동생 손을 잡고 운동장을 걷는 장면부터, 제야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는 것, 그 시절의 세밀한 마음도 재잘재잘 일기장에 떠드는데 그 사랑스러움은 끔찍한 일을 지나고 리듬을 잃게 된다.


제야는 당숙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하지만 부모를 포함한 그 어떤 어른도 제야를 보호하지 않는다.당숙이 돈을 잘 벌고, 그 돈으로 다른 이들을 돕고, 남자는 뭐 그럴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피해자인 제야는 스스로 산부인과와 경찰서에 가서 신고 후, 살려달라 외치지만 사람들은 제야를 ‘당숙 꼬드겨 인생을 망치려는 여자 문제’ 정도로 치부한다.
‘사람들은 성폭행도 나쁜 짓이라고 말하나?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재수 없는 일, 여자가 먼저 여지를 주니까 생기는 일, 남자가 술에 취하면 할 수도 있는 일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상한 잣대로 이상한 판단을 한다. 내게 강한 이빨과 턱이 있다면, 내가 개라면, 나는 물어뜯을 것이다(p. 128)’
그리고 제야는 강릉의 이모 집으로 떠난다. 완전히 새로운 도시와 사람은 제야를 하여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자국씩 현관문을 나서게 했다. 가방에는 언제나 칼이 들어있었고, 숨쉬듯 그날이 지옥처럼 떠올라 스스로를 망친 날도 많았지만 제야는 그럼에도 살아내고 싶었다. 잘못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기에 제야는 강해지고 싶었다.

제야는 어려서 일기를 두 개를 쓴다 했다. 하나는 선생님께 검사 받는 일기, 나머지 하나는 자신만 보는 일기. <이제야 언니에게>는 제야가 혼자 쓴 일기를 내내 읽는 기분이었다. 화가 났고 세상이 역겨웠지만 그 무엇보다 강해지고 싶은 제야를 보며 눈물이 났다. 도와줄 누군가 하나 없지만 제야는 살고 싶어서, 제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나아가고 싶어서 계속해서 썼다.
동생 제니에게 제야가 쓴 마지막 페이지 이후 제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현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어제의 제야의 강렬한 다짐은 내일의 제야를 살아가게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그럴 수 있어.
나는 0이 될 수 있어

문장 속으로
• 평소 일기를 쓸 때 제야는 단어의 한계를 답답해했다. 단어들은 너무 납작하고 단순해서 진짜 감정의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바람이나 햇살, 풍경과 냄새를 표현할 때도 궁핍했다. 입체를 평면에 구겨 넣는 것만 같았다. 지금 제야는 단어의 한계에 안도한다. 자꾸자꾸 커지는 그날의 기억을 얄팍하고 단순한 단어에 가둘 수 있을 테니까. p.13
• 일어난 일은 종이가 아니니 찢어도 태워도 없어지지 않고 없던 일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없애버리고 싶다. 없던 일로 만들고 싶은 건 엄마도 아빠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쓰고 있다. 내게 모든 걸 떠밀고 나를 없애버리고 있다. 지금의 나를 쓰레기로 만들어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다 나를 위해서라고, 내 미래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찢어버리고 싶은 건 내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찢어지고 있다. p.49
• 이모는 제야의 손을 잡고 가만히 말했다. 어른으로서 미안해, 제야야. 정말 미안해. 제야는 울고 싶지 않았다. 울면 멈출 수 없고, 밤새 울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약해지는 것 같았다. 제야는 벌떡 일어나 앉고 싶었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기지개를 켜고 크게 소리를 내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강해지 고 싶었다. 하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굳은 채로, 무거운 채로 할 수 있는 건 우는 일뿐이었다. 제야는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p. 155
• 우울과 무기력증으로 이불 밖으로 도저히 나갈 수 없을 것 같을 때도 있었다. 신발을 신은 채 오후 내내 신발장 옆에 쪼그려 앉아 있기도 했다.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양말을 신기까지 한 시간 넘게 걸린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제야는 무당벌레를 생각했다. 날개를 펼치고도 날지 못하던 벌레. 그것을 빤히 쳐다보던 영원 같던 시간. 만지지 못할 것 같았는데 만졌고, 날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날아가던 무당벌레. 벌레도 못 만지면서 어떻게 실패 없이 사람을 죽이나 생각했던 그날 아침을. p.158
• 나랑 같이 있는 동안 너는 잘 먹을 거야. 대충 먹고 때우고 그러지 않을 거야.
나는 너를 대접할 거야. 네게 도움이 될 거야.
제야는 이모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생각했다. 이모란 사람에 대해. 지난여름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이모는 계속 낯 선 사람으로 남았겠지. 이런 사람이 지구 어딘가에 있다 는 걸 영영 모르고 살았겠지. 제야는 혼란스러웠다. 절대 겪고 싶지 않은 일을 겪었고, 지옥에 떨어졌고, 그 보상으로 이모를 만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모가 보상일 수 있나? 그런 일에 보상이 있을 수 있나? 이모는 어째서 이런 사람이고 당숙은 어째서 그런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어떤 사람일 수 있나? 제야는 사람이 저마 다 다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사람이 선해지고 나빠지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섭리가 있다면, 삶의 지도가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었다. 다른 길이 있는지, 다른 삶이 가능했던 건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더라도 알고 싶었다. 그럼 조금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 159-160
• - 잘해주는 게 아니라 걱정하고 아끼는 거야.
- 너무 노력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 노력해야 해.
이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 사람은 노력해야해.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래야 해.
- 노력은 힘든 거잖아요. 제야가 중얼거렸다.
- 마음을 쓰는 거야.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좋은 것을 위해 애를 쓰는 거지.
제야는 일기에 이모의 말을 썼다. 언젠가는 이모의 말 을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p.161
• 승호는 답을 알고 싶었다. 출구를 찾고 싶었다. 누나, 미로 있잖아. 승호는 제야의 손과 발을 주무르며 말했다. 미로에서 출구를 찾으려면 왼쪽 벽에 손을 대고 걸으면 된대. 그럼 미로의 길을 다 걸어야 할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출구가 나온대. 굳어 있던 제야의 팔 다리에 조금씩 혈색이 돌아왔다. 숨 좀 쉬어, 누나. 승호가 제야의 눈을 보며 말했다. 승호가 먼저 숨을 깊게 들이쉬 고 내쉬었다. 제야는 느리게 숨을 들이쉬었다.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침이 끝날 때까지 승호는 제야의 등을 쓸어 내렸다. 기침이 멈추고, 제야는 큰 숨을 내쉬었다. 나가서 좀 결을까? 걷다가 밥 먹을까? 승호가 물었다. 제야는 손 으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세웠다. 승호는 제야를 부축했다. 제야는 천천히 일어났다. 왼쪽 벽에 손을 댔다. p.194
• 그러니까 제니야, 이게 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살고 싶다는 말이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단 말이 아니야. 그런 일이 있었던 나로, 온전한 나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편에 서서, 제대로 살고 싶단 말이야.
나는 아직도 잠을 잘 못 자.
가끔 내가 누군지, 오늘이 며칠인지, 내가 몇살인지, 뭘 하고 있었는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헷갈려. 내 기억을 신뢰하지 못해서 혼란스러워.
• 나는 나로 살기 위해 내게 소중한 것들도 같이 내려놓기로 했어. 시작한다는 건 그런 거야. 내게 좋은 것만 쥐고 싫은 것은 버리고 그럴 수는 없어.p. 227
• 도서 │ 이제야 언니에게
• 작가 │ 최진영
• 출판 │ 창비
* 클릭하면 더보기로 이동해요
Copyright 2026. our warm camp All rights reserved. | chungmincamp@gmail.com
이 콘텐츠가 좋으셨다면 좋아요와 링크 공유로 응원해 주세요❤︎
| PLAYLIST | 내가 없는 그대가 궁금하지 않아도 (0) | 2026.02.25 |
|---|---|
| BOOK | 지난 날의 나 자신과 마주하는 일에 대하여 (1) | 2025.03.28 |
| PLAYLIST | 이상하게 네게 눈이 가 👀 (0) | 2024.11.22 |
| PLAYLIST | 시간 지나 사랑이면 그래도 사랑이면 (3) | 2024.04.19 |
| BOOK | 쳇 베이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0) | 2024.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