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시간을 믿기 시작했다. 이는 관광지에 쌓여있는 돌탑 같은 마음에 가까웠는데,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였던 것 같다. 시간은 거친 문제들을 동글동글 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조금은 망각하거나 흐릿해지게 하고, 때로는 오해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삶에 힘든 순간들이 찾아올 때면 '시간 지나면 자연스레 괜찮아질 거야'라는 마음을 주문처럼 외웠고, 그 다짐은 작은 빛이 되어 순간을 또 살아내게 했다.
《밝은 밤》은 등장 인물들이 아주 긴 시간을 통과하는 긴 호흡의 소설이다.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 후 서울에서 도망치듯 희령으로 내려온 주인공 지연이 오래 전 엄마와 관계가 소원해져 연락을 끊고 지낸 할머니 영옥과 우연히 만나며 시작한다. 지연의 삶에 영옥이 들어오며 그를 통해 자신의 증조모, 할머니, 엄마 그리고 자신에게 까지 이어진 삶의 흐름을 듣게 된다.
소설의 대부분은 영옥이 지연에게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단순한 액자식 구성으로 진행되지만,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독자들은 지연의 시선을 따라 호기심 가득한 모습으로 영옥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이는 소설이 지연의 입장에서 영옥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나의 언어로 무언가를 표현하게 되면 그때부턴 마음을 갖게 된다. 그 작은 틈은 자신과 상관없다 생각했던 존재를 지금의 나를 만든 애틋한 구체적인 존재로 만들게 되는 것이다. 지연이 영옥의 이야기에 깊게 빠질수록, 증조모와 할머니 그리고 엄마의 삶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삶의 연장선이 된다.
하지만 《밝은 밤》은 제목과 반대로 어두운 시절만이 이어진다. 백정의 딸로 태어나 세상에 환영받지 못한 증조모, 의지했고 사랑했던 새비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죽음, 남편의 이중 결혼으로 버려진 할머니와 첫 딸을 먼저 떠나보낸 엄마 그리고 남편의 바람으로 상처받은 지연까지. 한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 시대와 상황이 주는 상처에 그들은 상처 받고 어두운 시간을 버텨낸다.
하지만 깊은 어둠 사이에서도 그들의 삶은 작은 빛을 따라 이어진다. 세상에서 멸시 받던 백정의 딸이 양인의 아들과 결혼하며 죽음을 피한 순간, 새비 아주머니와 증조모가 나눈 우정의 순간, 희자와 함께 뛰어놀며 웃던 할머니의 순간, 할머니를 만나며 자신의 삶과 상처를 돌아보는 지연까지. 이렇게 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시간을 버티며 앞으로 나아간다. 상처는 시간을 따라 이어지지만 사랑도 시간을 따라 단단해지는 것이다.
최은영의 소설을 읽으면 어두운 방에 작은 촛불을 하나 켜는 느낌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캄캄했던 마음에 작은 촛불 하나를 켜면 온 방이 환해진다. 여전히 구석구석 어둡지만 그 불빛을 의지해서 어두움을 이긴다. 그래선지 《밝은 밤》이 희망으로 읽혔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긴 어두움을 지나가면서도 작은 희망을 붙잡고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간을 따라 더 단단해지는 사랑을 돌탑처럼 쌓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말이다.
문장 속으로
•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p.14
• 그녀에게는 희망이라는 싹이 있었다. 그건 아무리 뽑아내도 잡초처럼 퍼져나가서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희망을 지배할 수 없었다. 희망이 끌고 가면 그곳이 가시덤불이라도 그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말대로 그건 안전한 삶이 아니었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따라 기차를 타고 개성을 가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들의 경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체념하지 못하는 마음은 얼마나 질기고 얼마나 괴로운 것이었을까. p.56
• 원자폭탄으로 그 많으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p.130
• "그래, 똥강아지. 걔가 얼마나 감탄을 잘했는지 몰라. 작은 개구리 하나를 봐도 우와,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봐도 우와, 늘 우와, 우와, 하는 거야. 그런데 그건 너도 그렇더라. 언니를 보고 커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쩌면 우리 엄마로부터 이어졌는지도 몰라.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그렇게 감탄을 잘하니 앞으로 벌어질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받아들일까 싶었어.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우와, 하면서 살아가겠구나. 그게 나의 희망이었던 것 같아." p. 316
•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어요. p.333
• 도서 │ 밝은 밤
• 작가 │ 최은영
• 출판 │ 문학동네 @munhakdong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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