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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밴쿠버에서 한 달 살기로 했다

our warm camp/TRIP-log

by Chungmin 2024. 2. 2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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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밴쿠버로 떠나기로 했다.

 

비행기 티켓은 열심히 모은 항공 마일리지로 2월에 미리 끊어 두었다. 일찍이 긴 휴가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업무 유연제를 도입한 회사 제도와 열린 팀 분위기 덕도 있었지만, 당장 티켓이라도 끊지 않으면 퇴사할 것 같아서였다.

 

이상하게 매일 피곤하고 울적했다. 열심히 할수록 고립되는 기분이 들고 토요일 오전 부터 회사 갈 생각에 괴로워졌다. 매일을 견디던 당시엔 내 상황이 특수하다 여겼지만 모든 것이 다 지나고 이걸 쓰고 있는 지금, 주변 선배들에게서 반복해 듣던 퇴사 이유들과 나의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이것도 다 지나서야 할 수 있는 생각일 테다.

 

휴가에 가까워지던 어느 날, 용기내 미리 ok를 받았던 휴가 일정을 조정해야 할 상황이 생겼다. 갑작스러운 조직 개편으로 팀의 존재 여부가 애매해졌고, 다른 역할을 맡아야 할지도 모르는 큰 변화를 앞두고 있었다. 여러 상황들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면서 겨우 붙잡고 있던 얇은 끈이 끊어졌다. 퇴사는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 결정은 지금도 옳았다고 생각한다.

 

늦은 휴가로 계획했던 여행이 퇴사 여행이 되었다. 마지막 출근은 9월 15일, 출국은 9월 19일. 밴쿠버에서 한 달을 지내야겠다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이미 그곳에 정착해 있는 동생 덕이었다. 동생 집에 어느 정도 머무르며 방값을 아낄 수 있었고 비행기도 마일리지로 왕복이 가능해 가장 큰 지출을 줄였다. 당장 가서 먹고살 돈만 있으면 충분해, 여행 준비에 소홀해도 마음이 놓였다. 더불어 퇴사까지 해서 여행 기간을 무제한으로 늘려도 괜찮았다. 이렇게 준비 없이 어디론가 떠나본 건 처음인 것 같다. 

 

 

 

인천공항은 2019 몽골 이후 처음이다. 온라인으로 셀프 체크인까지 끝낸 상태라 공항에선 바로 짐만 붙이면 되었다. 코시국 이후로 공항 시스템도 대부분 셀프로 바뀌었다. 인터넷을 잘하는 나도 처음에 순서를 몰라 한참을 버벅거렸는데 핸드폰이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무척 어렵게 느껴질 것 같았다. 물론 직원분들이 나오셔서 도와주시지만 어딘가 묘하게 편리하면서도 불편했다.

*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시는 분들을 위한 팁
- 마일리지 티켓팅은 미리미리 하자. 몇 개월 전에 싹 매진되어 내가 원하는 날짜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
- 공항은 적어도 3-4시간 전에 도착하자. 무슨 일이 어떻게 생길지 모른다.
- 대한항공의 경우 앱을 통해 사전 셀프 체크인을 할 수 있다. 출발 하루 전 날이라도 해주면 공항에서 시간을 아낄 수 있다.
- 인천공항 앱으로 페이스 인증을 미리 해두고 가면 출국 심사가 1분 만에 끝난다.

 

 

 

대한항공 마일리지가 쌓이는 신용카드를 쓰고 있는 덕에 무료 라운지가 제공 되었지만, 이미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공항에 오는 것만으로 지쳐버린 나는 만원을 더 지불하고 라운지를 업그레이드했다. 가장 좋았던 것은 샤워가 가능하다는 점. 공항에 오고 짐을 붙이며 땀을 무진장 흘렸던 터라 찝찝했기에 라운지에 오자마자 샤워를 했다. 널찍한 욕실에 드라이기까지 있어 좋았다.

 

비행기를 타러 왔다. 라운지에서 실시간으로 비행 상황을 알려줘 충분히 쉬다가 플랫폼으로 향했다. 이때도 퇴사도 여행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여행을 기대하지 않아서일까, 그냥 무덤덤했다. 비행기를 타고 짐을 싣는다. 티켓 예약할 때 미리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자리로 선정해두었다. 앞에 아무도 없어 긴 비행 동안 눈치 보지 않고 다리를 쭉쭉 뻗을 수 있다!

 

 
 

비행기가 생각보다 많이 흔들려서 저녁이 늦게 서빙되었다. 밤 10시 가깝게 밥을 먹었는데 아까 라운지에서 뭐라도 먹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안 그랬으면 너무 배고팠을 것 같다.

 

음료는 대한항공에서 만든 맥주 KAL을 받았다. 디자인 귀엽다. 뭔가 카스 느낌 나는데 맛은 그냥 그래서 몇 입 먹고 내려두었다. 내 컨디션이 좋지 않아 입에 맞지 않을 수 있다. 

 

대한항공을 정말 오랜만에 이용하는데 돈만 많으면 계속 대한항공을 이용하고 싶었다. 티켓팅하는 앱 이용 경험부터 시작해서 여러 연동성, 앱 안에서 유저가 혼동 없이 하고자 하는 정보를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티켓팅부터 셀프 체크인, 짐 붙이기, 마지막 비행을 하며 만난 승무원분들까지 무척 친절하시고 프로페셔널하셨다. 다음에도 대한항공을 이용하고 싶을 정도! 마일리지 열심히 모아야겠다.

 

 

캐나다 공항 드디어 도착! 코시국 이후 캐나다도 셀프 체크인이다. 정보 하나 없이 찾아보고 무작정 떠난거라 영어 못 알아들을까 봐 긴장했는데 터치스크린도 한국어가 지원되어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 내가 했으면 다른 분들은 더 쉽게 하실 거라고 생각한다. 진짜 0.1도 준비 안 하고 갔다. 그냥 비행기만 탄 수준이었..😇

 

짐도 무사히 찾고 공항 와이파이 연결하여 마중 나온 동생을 만났다. 올해 4월 통영에서 만난 이후 처음이다. 반갑기도 하고 어제 만난 사람처럼 익숙하기도 하다. 무료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공유 자동차를 대여했다. 캐리어를 싣고 집으로 이동한다. 밴쿠버 풍경을 구경하며 동생이 설명해 주는 밴쿠버 특징을 듣는다.

 

긴 비행에 지쳤지만 지금 자버리면 시차 적응 망한다는 동생의 말을 듣고 집에 가서 샤워하고 라면 하나를 끓여 먹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가장 먼저 지하철 패스를 구입했다. 밴쿠버에 한 달 있을 거면 무제한 1달권을 사면 되는데(약 10만 원) 동생이 본인 패스를 나 놀러 다니라고 줬다. 그리고 본인은 티머니처럼 충전용으로 구입하는 중. 이미 정착한 동생 덕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해결하는 것들이 많다. 버스 타는 법, 티켓 사는 법, 버스 내리는 법. 별거 아니지만 한국과 법칙이 다르기에 검색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을 동생 덕에 쉽게 취득한다. 저걸 다 익숙하게 하기 위해 동생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홀로 보냈을까.

 

 

 

첫날 밴쿠버엔 비가 왔다. 걸으며 다운타운을 구경하다가 팀홀튼에 들어가 커피 한 잔과 작은 도넛 세트를 먹었다. 유명하다는 증기 시계를 구경하고 근처에 있는 기념품 샵에 가서 키링과 기타 엽서를 구경한다. 키링은 어쩐지 촌스럽고 주렁주렁 달린 것이 더 귀엽게 느껴진다. 한국은 모두 도어록이지만 외국은 여전히 열쇠를 활용하고 키링을 좋아하는 나에겐 새로운 키링을 살 명분이 충분했다.

 

밴쿠버 다운타운은 서울 풍경과 비슷했다. 여기 을지로에서 시청 가는 풍경 아냐? 저기 강남 같은데? 영어만 없다면 비슷한 풍경을 지나며 밴쿠버를 더듬더듬 배워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어느 회사 사무실에 앉아있었는데, 며칠 만에 지구 반대편의 세계에서 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단풍국은 어딜 가나 단풍이 풍부하다. 우산 쓴 사람 찾는 게 더 어려운 밴쿠버. 한국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동생과 함께 밴쿠버 시민처럼 비를 아무렇지 않게 맞으며 지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첫날은 정신없이 흘렀으나 오랜만에 타국에 있던 동생을 봐서 좋았다.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쟤도 여기서 힘들고 외로웠던 것 같다. 전화로 들었을 때 체감하는 것과 직접 동생의 삶 현장에 와서 보는 무게는 달랐다. 왜 더 알아주지 못했을까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누나로서 슬펐다.

 

이렇게 밴쿠버에 도착했다. 쓰고 나니 별 거 없다. 퇴사하고 여행을 온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여행이 특별한 이유는 내 삶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한 달 정도 지낼 예정이다. 다들 캐나다 가면 공원밖에 없는데 심심할 거라 말하지만 나는 지금 어떤 힘도 없는 상황이라 뭐라도 좋다. 즐거웁게 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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