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계절 사이엔 언제나 비가 내렸다. 몇 번의 비가 시원하게 내리고 나면 달라진 계절의 공기를 만날 수 있었다. 마치 계절의 마디를 잇는 듯이.
'나는 계절을 냄새로 감각하는 것 같아'
오래전 인천의 한 바닷가를 걸으며 이런 말을 했다. 계절 사이 내리는 비엔 새로운 계절의 냄새가 섞여오는 것 같다고. 비를 따라 짙어지는 향을 맡고 있다 보면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있다고. 그 애랑 걷던 그날 밤도 한참 비가 내렸다. 처마 아래서 옷의 물기를 털면서 '정말 비에 냄새가 묻어있는 것 같아'라고 그 애가 답했다.
비를 피하려 들어간 가게에서 그애랑 나는 바지락 칼국수를 먹었다. 세수 대야보다 큰 그릇에 칼국수 면과 바지락이 끝도 없이 나왔다. 약간 쌀쌀해진 공기에 따끈한 국물을 홀짝홀짝 마신 다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발을 후후 불어 한 입 가득 먹으면 입술 사이로 끈적한 찰기가 묻은 매끈한 칼국수의 면발이 기분 좋게 지나간다. 바지락 때문에 나는 그냥 먹어도 간이 간간했는데 그 애는 김치를 먹고 또 먹었다. 배가 터질 것 같다면서도 큰 그릇에 고개를 콕 박고서는 짧은 칼국수 면까지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돼지 같다며 나는 놀렸고 그 애는 놀림에 억울해 했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곤 했다.
우수는 입춘과 경칩 사이의 절기로 이맘 때는 봄비가 내린다. 비가 오며 계절이 봄 쪽으로 조금씩 더 걷는 것이다. 깜짝 내리는 비에 날씨는 잠시 추워지지만 이날 이후엔 아무리 춥던 날씨도 너그러워진다고. 비가 오길래 집 앞 마트에서 작은 바지락을 사선 해감을 하고 그 사이에 다시 팩을 넣어 멸치 육수를 냈다. 오늘은 따끈한 두부가 먹고 싶어 내 멋대로 국물에 작게 자른 두부를 퐁당 넣는다. 애호박 대신 봄동 잎을 잘게 썰어 넣고, 마지막으론 칼국수 면을 넣는다. 면에 뭍은 밀가루 덕에 국물은 금방 되직해진다. 거기에 소금 조금 톡톡 올리고, 함께 먹을 김치를 내면 준비를 끝이다.
바지락이 더해진 육수 덕에 집에서 만든 칼국수도 꽤 훌륭하다. 국물에서 바다에서 자란 것들만이 줄 수 있는 감칠맛이 더해진다. 뜨거운 김이 그릇 위로 모락모락 퍼진다. 잘 익은 김치를 하나 위에 올려 입안 가득 넣는다. 따스한 온도가 얼굴 주변으로 퍼진다. 냉장고에 있던 맥주 한 캔도 꺼내 한 입 마시며 그릇 속 바지락 껍질을 골라낸다. 그릇 옆에 차곡차곡 쌓이는 바지락 탑과 함께 이제는 볼 수 없는 그 애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밤의 바닷가를 걸으며 나눈 얘기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데 그날 비에서 맡았던 봄의 향은 왜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지. 봄비가 내리던 날, 어느 밤 바닷가, 함께 먹은 칼국수, 서로를 놀리며 깔깔 웃었던 소리. 마음을 다했던 지난날이 지금까지 유효하진 않지만, 좋았던 순간은 아름다운 유리 조각처럼 내 속에 남아있다.
우수(雨水) | 24년 2월 19일 무렵
봄에 들어선다는 입춘과 동면하던 개구리가 놀라서 깬다는 경칩 사이에 있는 24 절기의 하나. 입춘 입기일(入氣日) 15일 후인 양력 2월 19일 또는 20일이 되며 태양의 황경이 330도의 위치에 올 때이다. “우수 뒤에 얼음같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슬슬 녹아 없어짐을 이르는 뜻으로 우수의 성격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무렵에 꽃샘추위가 잠시 기승을 부리지만 “우수 경칩에 대동강 풀린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수와 경칩을 지나면 아무리 춥던 날씨도 누그러져 봄기운이 돌고 초목이 싹튼다.
*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절기록(節氣錄) | 자연스럽게 살고 싶어 시작한 기록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챙겨 먹는 친구가 있다. 봄에는 도다리 쑥국, 여름에는 참외 샐러드, 가을에는 홍시, 겨울에는 방어와 붕어빵. 그 애는 철마다 시장에 가서 식재료를 구경하는 재미를 알고, 그것들로 따듯한 밥을 지어 친구들과 나눠 먹는 행복을 아는 사람이다. 그 애를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흘러가는 시간에 충실하고 싶어 기록해 보는 계절 일기. 절기록은 계절 속에서 먹고 마시고 듣고 웃으며 사랑하게 된 순간들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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